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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09.고려후기의 정치-02

by ▩¶▷◑♣ 202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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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민왕의 개혁정치
    1. 공민왕은 14세기 중국의 원, 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였다.
    2. 초기에는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 몽골식 머리 모양인 변발과 옷인 호복을 입던 몽골풍을 폐지하고 왕권은 제약하고 신진사대부들의 등장을 억제하던 정방을 없애고 권문세족으로부터 인사권을 회수하여 전리사와 군부사로 나눠주었다. 또한 기황후와 몽골의 배경으로 세력을 형성하며 국왕권을 위협했던 기철이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하였고, 고려를 내정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인우로 하여금 무력으로 쌍성 총관부를 공격하도록 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고 원의 연호 사용을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고려 전기 문종 대 관제로 환원시켰다.
    3. 공민왕 시기에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이 있었다. 1차 때는 서경이 함락되기도 하였으나 이승경과 이방실 등이 격퇴하였다. 2차 때는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까지 피난하기도 하였으나 이성계와 이방실 등이 격퇴하였다. 원의 장수 나하추가 침입했을 때는 이성계가 격퇴하였다. 1363년 공민왕이 복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개경 주변 흥왕사에 머물다가 시해 위협을 당하는 흥왕사의 변이 일어났다. 이는 부원배와 결탁한 김용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공민왕은 시해를 면했으나 왕으로 위장하고 있던 안도치가 죽음을 당하였고, 이 반란은 최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정하였다. 
    4. 1365년 노국대장 공주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국정 주도권을 회복하고 개혁하기 위해 신돈을 등용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을 사부로 삼고 국정을 자무하였다. 신돈은 전민 변정 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양민으로 해방시켜주었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1367년에는 성균관을 다시 짓고 이색으로 하여금 성균관대사성으로 삼아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공민왕은 임금이 직접 주재하는 과거인 친시를 단행하여 유신들의 자주-문생 관계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요동의 동녕부 정벌을 단행하여 1369년에는 이성계와 지용수를 원수로 삼아 1370년 우라산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2차 정벌은 단행하여 요양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고 시변 호위 및 인재 양성을 위하여 궁중에 자제위를 설치하고 공신과 고위 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였다.
    5. 공민왕은 북으로는 홍건적,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반원 정책 개혁에 실패하였다. 권문세족들의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개혁 추진의 핵심인 자제위 문제로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개혁 추진 세력인 신진사대부 세력이 결집되지 못한 상태에서 권문세족의 반발에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영향을 받아 신진 사대부의 개혁 추진 과정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가 이루어졌다.
  2.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1. 원 명 교체기에 원의 쇠약을 틈타 홍건적이 원의 추격에 쫓겨 고려를 침입하였다. 1차 침입 때는 고거경 등 홍건적 군사 4만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하였고 이승경과 이방실 등이 격퇴하였다. 2차 침입 때는 사유 등 홍건적 10만이 개경을 함락하였고, 공민왕은 복주로 피신하였는데 이는 안동 놋다리밟기의 유래가 되었다.
    2. 왜구는 13세기부터 침략을 시작하여, 14세기 중반에는 본격적으로 침략해왔다. 14세기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남북조 시대가 열리는 혼란기가 전개되면서 지방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일본 서부에서 대규모의 무장 세력들이 왜구가 되어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약탈하였다. 이 당시 원의 간섭 하에 있어 국방력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던 고려는 초기에 효과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쓰시마 섬 및 규슈 서북 지역에 근거를 두고 부족한 식량을 고려에서 약탈하기 위해 고려 해안에 침입하고, 식량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약탈해 갔다. 이들의 활동 범위는 경상도 해얀에서 시작하여 점차 전라도 지역으로 범위를 확대해갔고, 심지어 개경 부근까지도 나타났다. 한 해 동안에도 수십 번씩 침략을 해왔기 때문에 해안에서 가까운 수십 리의 땅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영향으로 농민 생활이 피폐해져 수취 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수군은 궤멸 상태에 이르렀고, 왜군의 침입으로 재건이 필요하였기에 이희. 정준제 등의 건의로 1374년 수군을 창설하였다. 1377년에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약과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였고,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와 같은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3.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정몽주 등을 일본에 보내 교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이를 억제할 힘이 없어 실효성이 없고, 왜구를 격퇴하고 불안함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홍산 대첩, 진포 대첩, 황산 대첩, 관음포 대첩, 쓰시마 정벌의 무력 토벌을 전개하였다. 
      • 홍산대첩: 왜적이 연산의 개태사를 도륙하고 원수 박인계가 패하여 죽으니 최영이 이를 듣고 자신이 출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두세 차례 간청하여 신우가 허락하는 최영은 지체하지 않고 떠났다. 최영이 양광도도순문사 최공철, 조전원수 강영, 병마사 박수년 등과 함께 홍산에 가서 장차 싸우려 하였다. 최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을 점거하였는데, 3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길만 통할 수 있었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겁내어 진격하지 않았다. 최영이 몸소 사졸들 앞에 서서 용맹하게 돌진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는 풀과 같았다. 적 한 명이 숲 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추니 피가 낭자하게 흘렀는데, 태연하게 적을 쏘아 활시위를 당겨서 쓰러뜨리고 이내 맞은 화살을 뽑았다. 최영이 더욱 힘쓰니 마침내 적을 크게 격파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출처 [고려사]
      • 진포대첩: 우왕 6년 8월 추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왜구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로 쳐들어와 중청, 전라, 경상도의 3도 연해의 주군을 돌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최무선, 심덕부 등이 나서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왜선을 모두 불태웠다. 배가 불타 갈 곳이 없게 된 왜구는 옥천, 영동, 상주, 선산 등지로 다니면서 이르는 곳마다 폐허로 만들었다. -출처[고려사]
      • 황산대첩: 이성계가 이끄는 토벌군이 남원에 도착하니 왜구는 인월역에 있다고 하였다. 운봉을 넘어온 이성계는 적장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선두에 나서서 전투를 독려하여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적군을 섬멸체 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1600여 필의 군마와 여러 병기를 노획하였다고 하며, 살아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출처[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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