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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세
- 몽골의 팽창: 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되고 국가를 형성하고 금을 공격하면서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금의 지배항 있던 거란족의 일부는 대요수국을 건국하였고, 여진의 잔여 세력이 두만강 지역에 동진 국을 건국하였다.
- 여 몽의 접촉: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에 침입해 왔으나, 제천 방면에서 김취려에게 대파당하였다. 이후 거란족이 다시 고려에 침입하였고, 고려군은 거란에 반격하여 강동성에서 포위하였다. 이때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 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몰아냈다.
- 분쟁: 몽골은 거락족을 토벌해 주었다는 구실로 고려에 지나친 고울을 요구하였고,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국경 지대에서 필살당하였다.
- 몽골의 침입
- 1차 침입: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을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다. 몽골군이 의주를 점령한 뒤, 귀주성에서 박서의 저항과 충주에서 지광수와 노비 군의 활약 등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그 결과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 중부는 몽골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몽골은 서북면 지방에 다루가치를 배치하고 철수하였다. 여기서 박서는 몽골군이 귀주까지 진군하자 김경손 등과 함께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귀주에 집결했다. 몽골군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자 성안의 군사들은 적을 기습 공격해 패주 시켰다. 몽골 군사가 위주 부사 박문창을 생포한 후 성으로 들어가서 항복을 권유하게 하자 박서는 그를 처형해 버렸다. 또 몽골이 정예 기병 3백 명을 뽑아 복문을 공격해 오자 박서는 그들을 쳐서 물리쳤다. -출처 [고려사]
- 2차 침입: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몽골이 다시 침입해 왔으니 처인성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냈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다.
- 3차 침입: 강화도에서 최우는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겠다는 염원을 담은 재조대장경 조판 사업을 시행하였고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 4.5차 침입: 몽골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출륙을 요구하며 다시 침입하였다. 김윤후가 이끈 충주성 전투에서 충주 관노와 잡류 별초는 몽골군에 대항하여 분전하여 침입을 격퇴하였다. 이후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고, 왕족을 몽골로 보내고 강화를 맺었다. 몽골군의 5차 침입 당시 70여 일간 충주성을 포위하여 군량이 거의 바닥났다. 김윤후가 군사들을 북돋우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해 싸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직을 제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관노 문서를 불사르고, 소와 말도 나누어 주었다. 이에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 6차 침입: 몽골의 6차 침입 때에는 충주 다인철소민들이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훈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다.
- 고려의 항정: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고자 최 씨 무신 정권은 송악에서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장기 향전을 꾀하였다. 지방의 주 현민들에게는 산성이나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서 오랜 전쟁에 대비하게 하였다. 강화도 정부는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몽골의 침략에 자력으로 맞섰으며, 용감하게 대항하였다. 충주 다인철소 처인 부곡에서의 승리가 몽골군을 격퇴한 대표적 사례이다.
- 결과: 몽골군은 이르는 곳마다 살육을 자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막대한 희상을 당하였고,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거두어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구 부인사의 대장경판, 황룡사 9층 목탑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 무신 정권의 붕괴와 개경 환도: 고려 조정에서는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온건파가 득세하여 최 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동안 대몽 항쟁을 주도했던 최 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몽골과의 강화가 추진되었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원 세조를 만나 강화를 체결하였다. 이후 고려 정부는 무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화에 천도한 지 39년 만인 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몽골의 노골적인 간섭 하에 놓이게 되었다. 몽골이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히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의 결과였다.
-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는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무신 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굴욕적 강화 체결에 반발하여 배중손의 지위 아래 반기를 들었다. 강화도에서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 강화산성에서 배중손의 지휘로 승화 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기를 들었다.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지망 여 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었다. 진도 함락 후에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으나 결국 평정되었다. 원은 1273년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삼별초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골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의의로 고려 무인의 항몽 정신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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