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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의 내정 간섭
- 일본 원정: 몽골과 강화한 이후 고려의 자주성이 크게 손상되었다. 전쟁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 일본 원정에 동원됨으로써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원은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둔전을 설치하도록 하고 그 경영을 위해 둔전 경략사를 설치하는 하편, 막대한 양의 군량과 함선 및 군사를 마련하게 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274년에 제1차 일본 원정이 단행되었다. 하지만 일본 막부의 저항과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원은 다시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이듬해 2차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이번에도 태풍을 만나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 원 연합군을 조직하여 일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가마쿠라 막부의 저항과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원이 전쟁을 위해 서리한 정동행성은 계속 남아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본은 여 원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과도한 군비 지출 등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은 오랜 전란에 지친 고려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 영토의 상실과 수복: 원은 고종 말년에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였다. 공민왕 6년에 무력으로 회복하였다. 동녕부는 원종 때 최탄의 투항으로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고, 충렬왕 16년에 회복하였다. 탐라 총관부는 삼별초의 항쟁으로 진압한 뒤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일본 원정을 위해 목마장을 경영하였고, 충렬왕 27년에 회복하였다.
- 관제의 격하: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고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은 통합되어 첨의부로 격하되었고 6부는 4사로 축소, 통합되었다. 중추원은 밀직사로 격하되었고 도병마사는 국정 전반을 담당하게 되어 도평 의사사로 개칭되었다. 충렬왕 때는 원의 주현 포도 기관이었던 기관을 모방하여 순마소를 설치하였다. 순마소는 감찰, 왕권 보호 등의 정치 경찰적 활동을 하였고 이후 순군만호부로 개편되었다.
- 원의 내정간섭: 내정 간섭 제도로 심양왕 제도, 독로화 제도, 입성 책동, 원의 법속 강요, 중조 사건이 있다. 심양왕 제도는 원이 남만주 심양 일대에 포로나 유민으로 온 고려민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고려왕의 견제 수단으로 활용하였으며 심양왕과 고려왕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독로화 제도는 고려의 세자가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인질이 되어 머물다가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하는 제도였다. 입성 책동은 부원배들이 원나라로 하여금 고려에 행성을 세우도록 획책한 사건이다. 이는 고려국을 없애고 새로운 행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원의 직할령으로 직접 지배하자는 주장이었다. 고려 왕실의 혈족혼을 비난하고 몽골식 의복이나 변발 등 몽골의 법속을 강요하였고, 원은 황제 즉위 또는 집권 세력의 변동 시에 고려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국왕을 교체하는 중조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 시기에 발생하였다. 내정간섭 기구로는 정동행성, 순마소, 만호부, 다루가치, 동경 총관이 있다. 정동행성은 원이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개경에 설치한 기구로써 일본 원정이 끝난 후에도 유지하면서 연락 기구로 삼았다. 정동행성의 장관인 승상에는 고려의 왕이 임명되었다. 순마소는 감찰 기관이었으며, 반원 인사의 색출과 개경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군사적으로는 5개의 만호부, 천호부 등 십진법에 따른 군사 편제가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다루가치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 간섭 및 공물의 징수를 감독하였다. 동경 총관은 만주 일대 고려인들에 대한 통치 기관이다.
- 원의 인적, 물적 수탈: 관이나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가 조혼 풍습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공녀 선발을 피하기 위해 어린 신랑을 처가에서 양육해 혼인시키는 예서제가 성행하였다. 결혼도감을 통하여 원에 끌려간 여인들 중에는 특별한 지위에 오른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통스럽게 살았다. 일본 원정을 위해 전국에서 군사와 노역병을 징발하였다. 금, 은, 베를 비롯하여 인삼, 약재, 매 등의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매를 잡기 위해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고, 해동청을 사육하였다. 그 영향으로 왕권이 원에 의지하여 유지되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역할로 인해 고려의 정치는 크게 왜곡되었고 통치 질서가 붕괴되었다. 원에는 상인, 유학생, 학자, 승려 등 다양한 사람이 건너갔으며, 고려에 이슬람 계통의 사람들이 귀화하기도 하였다.
- 원 간섭기의 사회변화: 원 간섭기 이후에 전공을 세우거나 몽골 왕실이나 귀족과의 혼인, 몽골어 통역 등으로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철은 기황후와 원을 등에 업고 친원파 세력을 결집하여 토지 수탈 등의 권세를 부렸다. 그 외 역관, 노비, 환관, 응방 관리 등이 권문세족이 되었다. 원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문화와 풍속의 교류 또한 활발해져갔다. 고려에서 몽골어가 사용되었고 변발이나 몽골식 복장 등이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확신되면서 몽골식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고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고려의 의복이나 그릇, 음식 등의 풍습 등이 몽골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문화적인 교류로써 충선왕은 원나라 연경에 학문 연구소인 만권당을 설치하여 원의 조맹부와 이제현 등 학자들 간에 학문 교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 원 간섭기의 개혁 정치
- 원 간섭기 고려의 상황: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이전 시기부터 존속하였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집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장한 가문 등이 이른바 권문세족으로 새롭게 자리 잡았다. 권문세족은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고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로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 원 간섭기 개혁 정치: 총렬왕은 전민 변정 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의 농장을 혁파하려고 하였고 홍자번은 백성들을 위한 대책으로 공부의 균정과 정액 이외의 공부 수납 억제, 의창 등을 통한 백성의 구휼, 수령의 민폐 방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편민십팔사'를 올렸다. 이 시기는 원의 간섭으로 관제와 호칭이 격하되었고 고려는 원과 함께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1차 원정은 1274년에 시도하였으나, 일본 막부의 저항과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2차 원정은 원을 다시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1281년에 단행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재정을 개혁하기 위해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고 의염창을 설치하였으며, 농장과 노비 조사를 위한 전농사를 설치하였다. 또한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하여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왕실 종친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재상 지종을 발표하였다. 이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연경으로 건너가 만권당이라는 연구 기관을 설립하여 원의 조맹부, 고려의 이제현 등 당대의 일류 학자들을 모아 서로 교류하게 하였다. 충숙왕은 사심과의 지방 행정에 대한 영향력을 많은 폐단을 초래한다고 하여 사심관 제도를 폐지하고 권세가가 점유한 전민을 색출하기 위해 제폐사목소를 설치하였다. 약 1개월 뒤에 찰리 변위 도감을 개칭하였으나, 권세가들의 반발로 곧 폐지되었다. 또한 원나라 입조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반전도감을 설치하였고, 평양에 기자 사당을 건립하였다. 충혜왕은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를 받고 귀국해 즉위하였다. 그러나 1332년 원나라에 의해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원나라로 갔다가,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복위하였다. 고려 숙종 이후로 은병이 고액의 화폐로 사용되면서 사사로이 은에 동을 섞는 폐단이 생기자 충혜왕 원년에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크기를 줄이고 화폐 가치를 반으로 낮추어 사용하게 하는 소은병을 제작하였다. 충목왕은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각 도에 양전을 실시하였으며, 권문세족의 농장을 혁파하여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녹과전의 폐단을 시정하여 권세가들이 경기 지역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혁파하여 일반 관리와 국역 부담자들에게 지급하게 하였다. 왕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이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원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 세조 때 원각사지 10층 석탑에 영향을 주었다.
- 원 간섭기 개혁 추진의 한계: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저항 및 방해로 개혁이 추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개혁을 뒷받침하는 세력 기반이 갖춰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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