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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05. 고려의 문벌 귀족 사회

by ▩¶▷◑♣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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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모순
    •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 등의 혜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가문과 문벌을 중시한 문벌 귀족들은 비슷한 부류들끼리 폐쇄적 통혼 관계를 형성하여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벌 귀족 사회의 내부에서 정치권력의 독점과 경제적 특권의 확대를 둘러싼 분열이 일어났다.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료들 중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대표 사건으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있다. 
  2. 이자겸의 난
    • 배경: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 씨 가문은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 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러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한 왕의 측근 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에 불안을 느껴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 과정: 이자겸이 한안인 등 인종의 측근 세력인 반대파를 제거하고 도참설을 내세워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해 물러나고, 척준경도 정지상의 탄핵으로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이 몰락하였다.
    • 결과: 왕궁 소실, 문벌 귀족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개경의 지덕이 쇠했다는 풍수지리설과 서경 천도설이 대두되었다. 또한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이자겸의 난: 내시 김찬과 안보린 등이 왕을 시종 하면서 왕의 뜻을 알고 이자겸을 체포하여 귀양 보내고자 하였다. 척준경이 침전 좌측 문에 들어서니 별장 이작과 장군 송해충이 칼을 뽑아 들고 나옸다. 척준경이 물러나면서 외쳤다. "안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죽여라." 왕이 산호정에 갔는데 시종은 다 도망가고 근신 임경청 등 10여 명만 있었다. 왕이 해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이자겸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출처 [고려사]
  3.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왕권 강화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와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개경의 보수적인 문벌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인종의 동 조하에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과 팔성당을 세우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개경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 대위국을 건국하고 연호는 천 개,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하고 난을 일으켰은, 약 1년 만에 김부식이 이끄는 과군의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그 영향으로 문벌 귀족 세력이 강화되고, 숭문 천무 현상이 두드러져 무신정변의 배경이 되었고, 서경의 지위가 하락하고 분사 제도도 폐지되었다. 서경 천도 운동은 무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신진 세력 간의 대립이었다.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사상의 충돌이었다. 고구려 계승 이념과 신라 계승 이념에 대한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사회 내부의 무순이 드러낸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자주성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평하였다.
    • 인종의 '유신지교'반포:  "내가 천지신명의 크나큰 명령을 받아 조종의 유업을 이어받아 삼한을 다스린 지 6년이 되었다. 그러나 슬기는 지략을 내지 못하고, 지혜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밝히지 못하여 재변이 계속 일어나 조금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지난해 2월에는 불충한 무리가 그 틈을 타서 군대를 일으켰다가 음모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모두를 법으로 다스렸고, 이로부터 허물을 반성하고 몸을 자책하고 보니 내가 저지른 잘못이 참으로 많았다. 이제 일관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행차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유신의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하며 중앙과 지방에 모두 반포하니 백성들이 모두 알도록 하라  - 출처 [고려사]
    • 신채호의 서경 천도 운동 인식: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취 사상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저ㄴ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출처 [초선사 연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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