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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정변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심화되었고,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이 당시에는 과거 제도를 무과를 거의 시행하지 않았고, 무신 최고 지위이니 상장군, 대장군이 3품에 불과했으며 군대의 최고 문신에 비해 무신이 차별대우를 받았다. 의종은 문신을 우대하며 무신을 차별하고 측근 세력을 키워 의존하며, 향락에 빠지는 등의 실정을 거듭하여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무신들은 전시과 토지 분급이 문신보다 낮았고 군인전 미지급으로 인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 무신 정변이었다.
-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무신들은 의종의 보현원 행차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고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 무신 정변의 결과로써 무신 정권 초기에는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국정이 혼란하였다. 정중부, 이의방 등은 권력을 장악하고, 무신들의 회의 기구인 중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신과 문신의 관직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한 문무 겸직제를 시행하여 무신이 재신과 추신이 될 수 있게 하였다.
- 무신 정변의 변천
- 정중부는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나갔다. 또한,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그 다음 경대승은 정중부를 제거하고 집권하였으며, 사병 집단인 도방을 처음 설치하였다. 경대승을 살해하고 천민 출신의 이의민인 김보당의 난 때 공을 세워 정계에 진출하였고, 이후 중방을 중심으로 무신 정권의 권력을 잡았으나 최충헌에게 피살되었다. 최충헌은 1197년에 명종을 폐하고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을 옹립하였다. 최충헌은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였으나, 권력 유지에만 치중하여 사회 개혁은 흐지부지되었다. 최충헌이 국왕에게 올린 '봉사 10조'의 내용을 보면 그가 당시 고려 사회의 심각한 폐단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은 수십 년 집권하는 동안 제대로 된 개혁을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문신들로부터 빼앗은 권력과 경제력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수탈과 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길러 권력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 농장을 소유하였으며, 특히 진주 지방을 식읍으로 받아 경제권을 장악하고, 희종 때 진강 후의 벼슬을 받고 흥녕부를 설치하였다. 교정도감은 관리의 감찰과 인사 행정 및 재정권까지 담당한 최고 집정 기관으로, 그 장관인 교정별감은 최 씨 일가가 대대로 세습하였다. 이처럼 교정도감이라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정치 기구가 탄생하면서 중방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사병 기관은 도방을 부활하고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으며 농민 항쟁 진압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 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왕실과 귀족의 교종과 사원을 억압하고 선종 조계종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이규보, 진화 등을 우대하는 등 문신을 등용하여 무신을 견제하였다. 최충헌 다음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문신들의 숙위 기구인 서방을 설치하여 문학적인 소양과 함께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능문능리의 문반 관료들을 등용하여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규보, 이인로, 최자 등이 서방에서 활약하였다. 최 씨 정권의 사병 조직 중 하나인 마별초를 조직하여 기병대로 편성하였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 순찰과 도둑을 단속하게 하였고 이 야별초는 후에 삼별초로 확대, 개편되었다. 대몽항쟁기에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고려 고종은 1233년 최우에게 천도한 공을 인정하여 진양 후에 봉하였고, 그의 집은 진양부가 되었다. 이처럼 최충헌뿐 아니라 최우도 부를 설치하여 왕자 등과 동등한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강화도 시기에는 상정 고금 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하였고,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해 줄 것을 빌었다. 이처럼 최 씨 정권은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약화되었고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김준 이후 임연, 이유무 부자가 집권하였으며, 원종 때 임유무가 제거되면서 무신 정권은 끝났다. 이후 원 간섭기가 시작되었다.
- 사회의 동요
- 최초의 반 무신의 난은 김보당의 난으로,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를 꾀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이의민 등이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함으로써 이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교종 승려 귀법사의 난은 문벌 귀족과 연결되었던 귀법사 등 교종 계통의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사건이다. 조위총의 난은 서경 유수 조위총이 지방군과 농민을 이끌고 중앙의 무신들에게 3년간이나 항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위총의 난에는 많은 농민이 가세하여 농민 항쟁 성격을 띠었다.
- 무신 집권기에는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는 더욱 늘어났고, 정치 싸움으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 망이 망소이의난: 공주 명학고에서 망이 망소이가 신분 해방을 외치며 봉기하였다. 이후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켰고, 향소부곡이 점차 소멸되는 계기가 되었다.
- 김사미 효심의 난: 고려 명종 때인 1193년 김사미 세력과 효심 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농민봉기이다. 김사미는 운동, 효심은 초전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한때 경사도 전역을 장악하고 토벌군에 대항했으나, 이듬해 진압되고 말았다.
- 전주 관노의 난: 경대승의 집권기에 전주 관노의 난이 일어나 한 때 전주를 점령하였다. 기두 중독 등 6명이 관노와 여러 불평자들을 불러 모아 난을 일으켜, 진대유 산속의 절간으로 쫓아내고 이택민 등 10여 명의 집을 불태우니 향리들이 모두 도망치고 숨었다. -출처[고려사]
- 만적의 난: 최충헌의 사노인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신분 차별에 항거하며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국가에서 경계 이래 고관이 천민계급에서 많이 나왔으나, 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힘써 일하고도 매만 맞고 살아야 하는가? 주인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살라서 삼한으로 하여금 천민이 없게 하면 공경 장상은 모두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이다. -출처[고려사]
- 삼국 부흥 운동: 서경에서 고구려 부흥을 표방한 최광수의 난이 일어났고, 담양에서 백제 부흥을 표방한 이연년의 난이 일어 났다. 신라에서는 1193년 운문, 초전에서 신라 부흥을 표방한 김사미 효심의 난이 일어났고, 1202년에는 경주에서 이배 패좌가 주동이 되어 신라 부흥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 무신 정변의 영향
- 문벌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관료 체제로의 전환이 촉진되었다. 왕권이 약화되고 무신들이 중방과 교정도감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였다.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고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농장이 증가하였다. 국가의 수취와 집권층의 수달이 심화되어 민생이 피폐해졌다. 정치 싸움으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하층민 출신에서 출세한 자가 늘며 신분제에 동요가 일어났다. 불교계는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개혁과 본연의 자세를 확립하려는 결사운동이 일어났고 무신권의 후원으로 지눌이 선종 중심의 조계종을 개창하였다. 문화적으로는 소외된 문신의 패관 문학과 은둔적 시조 문학이 발달하였고, 문벌 귀족이 몰락하면서 유학이 쇠퇴하였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몽골 침입 등 국가적인 위기로 인하여 각훈의 [해동고승전]과 이규보의 [동명왕 편]과 같은 민족의 자주 의식이 강조된 사서가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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