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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04. 고려의 대외관계

by ▩¶▷◑♣ 2022.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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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의 외교 정책
    1.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서경을 북진의 전진기지로 개척하고 거란에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이 당시 송나라는 문치주의로 인한 국방력 약화로 인하여 고려와 제휴하여 거란을 견제할 목적이 있었고, 고려는 송과 제휴하여 거란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으나. 송의 군사적 제의에는 응하지 않았고, 주로 경제적 문화적 목적으로 송과 교류하였다.
    2. 정안국의 등장: 발해가 멸망한 뒤 유민들은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고구려가 일어났던 압록강 주요 지역에 정안국을 세웠다. 정안국은 송과 연합하여 거란 협공을 시도하였으므로, 거란은 정안국 문제를 먼저 처리하여야 했다.
  2. 거란의 침입과 격퇴
    1. 거란의 1차 침입: 10세기 초에 통일된 국가를 세운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송과 연결되어 있던 정안국 및 고려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에 거란은 먼저 정안국을 정복한 다음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고려에 이끌고 침입해 왔다. 거란이 소손녕은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을 것과 송과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청천강에서 거란의 침략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거란의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거란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았으며,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후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고려의 국경이 압록강까지 확장되었다.
    2. 거란의 2차 침입: 고려는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거란과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4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하였다. 거란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 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관산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그 결과 거란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거란은 고려가 하공진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물러갔다. 
    3. 거란의 3차 침입: 고려가 친조의 약속을 불이행하고, 거란의 강동6ㅈㅜ 반환 요구를 거부하였다.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다. 압록강의 건너자 흥화진을 우회하여 남하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적군의 작전을 미리 간파한 강감찬은 삼교천 상류의 둑을 막고 군을 매복하도록 하였다.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둑을 터 수공을 펼쳤으며, 매복한 군사로 적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개경 부근까지 침입해 온 거란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거란 군사가 수천에 불과하였으며, 거란은 고려와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4. 영향: 고려가 거란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도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거란과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강감찬의 건의로 나성을 축조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거란을 물론 여진의 침입까지 방어하려 하였다. 거란과의 강화로 북진 정책은 보류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보수주의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7대 실록]과 초조대장경을 조판하였도, 전쟁 이후 요와 교류하여 거란의 대장경이 의천의 속장경에 영향을 끼쳤다. 
  3.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1. 여진과의 충돌: 여진은 한때 말갈이라 불리면서 오랫동안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 여진으로 불리며 발해의 옛 땅에서 반독립적 상태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동화 정책으로 포섭해 나갔다. 
    2. 윤관의 여진 정벌: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 추장 아골타가 여진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기병 중심의 여진과의 1차 접촉에서 패한 고려는 여진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윤관은 신기군, 신보군, 항마병으로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하였다. 별무반은 위로는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양인 농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에서 동원된 거국적인 군사조직이었다. 예종 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고려는 여진의 계속된 침입으로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서북쪽의 거란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져 여진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다. 이에 고려는 다시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의 조건을 수락하고 약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3. 금의 건국과 사대 외교: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국호를 금이라 하고, 요를 멸한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고자 압력을 가해왔다. 고려는 금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었는데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은 현실적으로 금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의 군신 관계 요구를 받아 들였다. 이는 정권 유지를 위하여 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태조 이래의 북진 정책이 좌절되었고, 고려 사회의 분열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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