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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세계
- 동양의 중세
- 5대 10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송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게 되는 979년까지 약 70년에 걸쳐 흥망 한 여러 나라와 그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귀족 세력이 몰락하고 신흥 지주층과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그 이후 송나라가 들어섰다. 송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과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지만,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다. 그래도 장원과 전호제의 발달, 강남 개발 확대,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발달로 주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후에 송나라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원나라에 의하여 남송이 멸망하였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크게 일어나 중국을 차지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여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동서문화 교류가 크게 촉진되었다. 일본은 9세기 중엽 국왕권이 약화하면서 지방 호족이 장원을 소유하고 무사를 고용함으로써 특유의 봉건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 서양의 중세
-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서유럽 세계 형성의 중심이 된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와 제휴하여 성장하면서 로마 교회를 후원하는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9세기에 분열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토대가 되었다. 고전 문화와 크리스트교에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성장하였고, 왕권이 약화하면서 지방 분권 체제가 이루어졌다. 크리스트교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이 서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비잔티움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다. 황제 교황 주의의 그리스 정교가 발달하여 그리스 정교 중심의 비잔틴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비잔티움 문화는 초기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동북부의 슬라브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동유럽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가 무너진 후 정치적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이 침투하였다. 이슬람 제국은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한 뒤 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슬람 문화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북부의 크리스트교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이슬람 세력은 유럽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 동양의 중세
- 한국의 중세사회
- 중세 사회의 성격
- 정치: 신라 말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째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사상적으로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유교와 불교를 융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달리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시기에 줄기찬 항쟁으로 강력한 민족의식을 형성하여 외침을 극복하고, 황제국을 지향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은 사회 개혁 이념으로 성리학을 수용하여 합리적이고 미본적인 정치 이념을 천명하였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 경제: 전시과 제도의 시행으로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고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농민의 경제적 안정에 힘쓰며 구휼 제도 정비에 노력하였다.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하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 사회: 고려의 사회는 비교적 능력 위주의 개방적 사회로 신분보다 행정적 기능을 중시하였다. 지배 신분 안에서는 과거 제도를 통하여 계층 이동이 이루어졌고, 정치적 변동에 따라 신분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의 사회 신분은 4 계층으로 정착되어 귀족, 중류층, 양민, 노비로 구성되었다. 신라의 골품제보다 개방적이었지만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국가는 과중한 조세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이 늘어가자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사회 시책을 실시하였다.
- 문화: 교종과 선종의 총합 운동이 추진되면서 귀족 문화와 지방 문화가 공하게 되어 문화의 다양성과 독자성이 향상되었다. 이 시대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며,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형식을 창출하였다.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그림과 문학도 중세의 품격있는 멋을 찾아볼 수 있다. 후에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고,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되었다.
- 지방 세력의 대두
- 신라 말기에는 인구 증가, 혈족의 분화, 생산력 발전에 따른 지방의 성장 및 당의 선진 문물을 접한 6두품의 불만 증가로 부족제적 전통의 신분 질서인 골품제는 점차 사회 원리로써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6두품 지식인들은 사회 개혁을 꾀하였으나 신분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면서 반 신라적 경향을 띠어갔다. 한편, 진골 세력의 사치와 향락으로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진골 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해진 중앙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갔다. 진골 귀족들은 전국 각지에 대토지를 지배하여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토지는 면세의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국가 재정이 피폐해져 갔다. 또한, 국가 재정 피폐와 권력 쟁탈로 농민의 조세 부담이 더욱 커져가며, 몰락한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봉기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 호족 세력의 등장: 지방에서 독자 세력인 호족이 성장하여 중앙 정부에 항거하였다. 호족은 토착 지방 세력이 성장한 경우와 지방에 내려간 중앙 귀족이 호족화 한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정치 질서가 해이해지자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호족은 스스로 성주, 장군이라 칭하며 사병을 보유하였고, 지방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며 정치 질서에 반발하였다. 호족들은 신라의 지배 체제에 저항하던 농민을 흡수하여 새로운 정치 변혁을 이끌었으며 골품제가 붕괴한 이후 지방 출신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 후삼국의 성립
-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 견훤은 892년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 군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바탕으로 완산주에 도읍하여 충청도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의 오월, 후당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신라에 적대적이었던 견훤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경애왕을 살해한 뒤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또한,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고 호족 연합 정책을 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궁예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신라 왕족의 후예라고 전해진다. 북원 지방의 초적 집단인 양길의 휘하에서 세력을 키웠으며,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고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세력이 커지자 양길을 몰아낸 다음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 고구려를 세웠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다음 조령을 넘어 상주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영주를 차지하여 옛 신라 땅의 절반 이상을 확보하였다. 건국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내봉성 등 여러 관서를 설치하고 9 관등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후 고구려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조세를 지나치게 거두어들였고, 미륵 신앙을 이용한 전체 정치로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민심을 잃고 신하들의 신망을 잃게 되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 후백제, 후고구려가 각 지역에 할거한 호족들을 규합하여 건국되면서 잦은 침공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신라의 지배권은 경주 일대의 경상도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말년에는 왕건의 보호로 명맥을 유지할 따름이었다.
- 중세 사회의 성립
- 궁예를 몰아낸 뒤 신하들의 추대로 왕건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고,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천도하였다. 왕건은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서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중국의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강화하였다. 궁예의 신하가 되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등 영토 확장에 공을 세웠다. 특히 수군을 이끌고 금성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광평성 시중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는 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경륜과 철학을 가진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해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였고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취했다.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 융합하는 데 유용하였다.
- 후삼국의 통일 과정을 보자면 그 시작은 926년 발해의 멸망이 있다. 발해는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많은 고구려계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오자 태조는 이들을 받아들여 우대하였다. 특히 대광현의 귀순 때는 왕 씨 성과 관직을 하사하는 등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그 후, 견훤의 후백제군이 신라의 경주로 진격하자 경애왕은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도착하기 전 견훤은 경주를 함락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태조는 경주에서 철수하는 후백제군과 공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신숭겸, 김락 등이 전사하는 등 대패하고 말았다. 고창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고려가 통일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견훤이 신검 금강 두 아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금산사에 유폐되는 일이 벌어졌고,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여 신검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는 신라를 도와 이를 막아냄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이로써 고려는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여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선산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이 신검의 후백제군에 승리하여 후백제가 멸망하였고 고려가 후삼국을 재통일하였다.
- 중세 사회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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