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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1.고려 시대 지배 세력과 백성들의 생활

by ▩¶▷◑♣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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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배세력의 변화
    1. 문벌귀족: 귀족들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차지하여 문벌 귀족을 형성하였으며, 고려 사회를 이끌어갔다. 호족은 상호 간의 혼인 및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하여 귀족 가문으로 자리 잡고, 문벌 귀족 세력을 형성하였고, 지방 호족들이 과거나 공훈으로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6두품은 신라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이 과거나 공훈으로 중앙 관리로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였다. 개국공신들은 정치를 주도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가며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가문을 문벌귀족이라 하였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였고,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사회적으로는 같은 귀족끼리 중첩된 혼인 관계로 권력을 공고히 하고,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중앙 집권적 체제 고려 사회에서 귀족들은 개경에 거주하였는데, 그들 중에서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형벌로 낙향을 시키도록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관직에 따라 과전과 세습이 가능한 공음전을 국가로부터 받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 토지 수탈을 행하였다.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는 경원 이 씨가 있는데, 경원 이 씨는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의 앙실 외척으로, 80여 년간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 외 대표적 문벌 귀족으로는 해주 최 씨, 경주 김 씨, 파평 윤 씨 등이 있었다. 종래의 문벌 귀족들이 부패하고 도태되면서 새로 무신들이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았고,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면서 권문세족이 등장하였다.  
    2. 권문세족: 고려 후기에 정계에 고관 요직을 장악하고 농장을 소유한 최고 권력층이었다. 이들은 왕실 또는 자기들 상호 간에 중첩되는 혼인을 맺어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문벌 귀족 중에서 잔존한 세력과 무인 정권 시대에 대두한 무이 세력의 가문이 권문세족이 되었다. 원 간섭기 이후로는 주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등장한 부원 세력이 다수였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불교를 옹호하며 불교와 밀착하거나 온건하게 비판하였고, 유교적 소양이 약했다. 외교적으로는 친원적 성격을 때며 운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앙의 부재지주로 대농장을 소유한 최고 권력층이었고, 산과 하천을 경계로 삼을 만큼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하고도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몰락한 농민들을 농장으로 끌어들여 노비처럼 부리며 부를 축적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과거보다 주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보수적인 사회 세력을 형성하며 신분을 세습시켜 갔고 국정 최고 기관인 도평 의사사, 첨의부, 밀직사 등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들은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 개혁으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권문세족은 농장을 상실하였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3. 신진사대부: 지방의 중소 지주층, 자작농으로 가문이 한미한 하급관리나 향리의 집안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무신 집권기 이래 지방의 향리 자제들을 중심으로, 경제력을 토대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였다. 일부는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문세족이 되기도 하였고, 대부분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신진 사대부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행정 실무에 능한 학자적 관료였으며 주로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이고, 자신들의 기반을 침해하면서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족과 대립하고,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그들의 비리와 불법을 견제하며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해 나갔다. 외교적으로는 친명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조선 개창 이후에도 이러한 정책을 견지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구질서와 여러 가지 모순을 비판하고 전반적인 사회 개혁과 문화 혁신을 추구하였다. 또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전시과의 붕괴로 과전을 받지 못하게 되자 사전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권 문세 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인사권 장악으로 고위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고, 과전과 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1. 향도: 지금까지 확인된 최초의 향도 사례는 신라에서 609년경에 김유신을 중심으로 조직된 화랑도를 '용화향도'라고 지칭한 것이다. 고려는 삼국 시대부터 있어 왔던 향도를 계승하여 신앙의 결속을 다졌다. 농민들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고,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는 향리와 농민이 함께 모여 있는 조직이었는데, 향리가 조직을 주도하였다.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를 뜻하는데,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마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초기 향도는 단순히 매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의 제작이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시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되어 갔다. 
    2. 농민 보호책: 국가에서는 농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여러 사회 시책을 펼쳤다. 이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킴으로써 체제 유지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귀족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거나 권세가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고, 고리대 때문에 농민이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으로 이자율을 정하여 이자가 빌린 곡식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자모 정식 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는 농민들에게 그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주었고 농번기에 잡역을 면제하여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
    3. 권농 정책: 적전 경작으로 왕이 적전을 친히 갈아 농사의 모범을 보였고, 광종 때에는 공사전조법을 시행하여 농토를 늘리고 곡물을 증산함으로써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버려둔 진적을 새로 경장 하는 경우에 일정기가 면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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